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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생활문화

고장 나면 버리지 않고 고쳐 쓰던 곳, 동네 전파사는 왜 거의 사라졌을까?

by bnfthetisah 2026. 8. 22.

예전 동네 골목에는 ‘○○전파사’, ‘○○전자’, ‘TV·라디오 수리’ 같은 간판을 단 작은 가게가 하나쯤 있었다. 가게 안에는 오래된 텔레비전과 라디오, 전축, 카세트플레이어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작업대 위에는 납땜기와 드라이버, 테스터기, 각종 전선과 부품이 놓여 있었다. 손님은 고장 난 전자제품을 직접 들고 찾아와 “소리는 나는데 화면이 안 나와요” 혹은 “라디오가 갑자기 잡음만 나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주인은 뒷판을 열고 안쪽 회로를 살펴본 뒤 고장 원인을 찾아냈다. 간단한 부품 하나만 바꾸면 다시 몇 년을 쓸 수 있었고, 무거운 텔레비전은 기사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수리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제조사 서비스센터에 접수하거나, 수리비가 많이 나오면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일이 더 자연스럽다. 동네 전파사는 어느새 보기 힘든 가게가 되었고, ‘전파사’라는 말 자체도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다. 한때 동네 생활에 꼭 필요했던 전파사는 왜 이렇게 빠르게 사라진 것일까?

 

고장 나면 버리지 않고 고쳐 쓰던 곳, 동네 전파사는 왜 거의 사라졌을까?
고장 나면 버리지 않고 고쳐 쓰던 곳, 동네 전파사는 왜 거의 사라졌을까?

 

텔레비전 한 대가 귀하던 시절, 전파사는 동네의 필수 기술가게였다

전파사가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전자제품이 지금보다 훨씬 비싸고 귀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전축은 한 번 사면 오랫동안 사용하는 고가의 가전제품이었다. 특히 텔레비전이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새 제품을 쉽게 바꿀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화면이 흐려지거나 소리가 끊긴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고 새 제품을 사기보다는 고장 난 부분을 찾아 수리해 계속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이때 필요한 사람이 바로 동네 전파사 기사였다.

 

초기의 전파사는 이름 그대로 전파를 사용하는 기기를 주로 다뤘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축, 오디오 같은 전자기기의 내부에는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 저항, 콘덴서, 각종 배선이 들어 있었다. 고장이 나면 어느 부품에 문제가 생겼는지 직접 진단하고 교체해야 했다. 단순히 부품을 새것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납땜이 끊어진 곳을 다시 연결하고, 접촉 불량을 잡고, 안테나와 수신 상태를 조정하는 식의 기술이 필요했다. 따라서 전파사 주인은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라 전자기기를 실제로 분해하고 고칠 수 있는 기술자였다.

 

당시 텔레비전은 특히 수리가 잦은 제품이었다. 브라운관 방식의 TV는 크고 무거웠고 내부 구조도 지금과 달랐다. 화면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가로줄이 생기고, 전원을 켜도 화면이 나오기까지 한참 걸리는 일이 있었다. 채널이 제대로 잡히지 않거나 소리만 나오고 화면이 사라지는 문제도 흔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집주인은 가까운 전파사에 연락했다. 대형 제품을 직접 옮기기 어려우면 기사님이 공구가방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 TV 뒤판을 열고 수리했다.

 

라디오와 카세트플레이어도 전파사의 중요한 수리 품목이었다. 테이프가 돌아가지 않거나 소리가 늘어지고, 라디오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부품이나 고무벨트를 교체했다. 전축의 턴테이블이 멈추거나 스피커에서 잡음이 나도 전파사를 찾았다. 손님이 제품을 맡기면 주인은 며칠 뒤 다시 찾아가라고 말했고, 수리가 끝나면 고장 원인과 교체한 부품을 설명해주었다.

 

전파사는 판매도 함께했다. 건전지와 전구, 전선, 안테나, 플러그 같은 작은 전기용품부터 라디오와 선풍기, 전화기 등을 취급하는 곳도 있었다. 가정에서 전기 관련 문제가 생기면 “전파사에 물어보자”는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집의 안테나를 설치하거나 방향을 조절하고, 텔레비전 수신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맡았다. 지역에 따라서는 전기배선과 간단한 가전 설치까지 해주는 곳도 있었다.

 

무엇보다 전파사는 가까웠다. 제조사의 공식 서비스망이 지금처럼 촘촘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고장 난 제품을 멀리 보내 수리받는 것이 번거로웠다. 반면 동네 전파사는 몇 골목만 걸어가면 찾을 수 있었고, 주인이 고객의 집까지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오래 거래한 집이라면 제품 상태를 기억하거나 “지난번에도 이 부분을 고쳤다”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이어졌다.

 

당시에는 전자제품을 고쳐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한 번 구매한 물건을 최대한 오래 사용하는 문화가 있었고, 부품 하나 때문에 제품 전체를 버린다는 생각은 낭비처럼 느껴졌다. 전파사는 바로 그 생활방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기술자가 고장 난 원인을 찾아내고 손으로 부품을 교체함으로써 비싼 전자제품의 수명을 몇 년씩 늘려주었다.

 

전자제품이 더 복잡해졌는데 오히려 수리점이 줄어든 이유

얼핏 생각하면 전자제품이 많아질수록 전파사도 더 많아졌어야 할 것 같다. 과거에는 집에 TV와 라디오 정도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전자레인지,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 로봇청소기까지 수많은 전자기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동네 수리점은 오히려 줄었다. 그 이유는 전자제품의 ‘수리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자제품은 비교적 큰 개별 부품으로 구성돼 있어 숙련된 기술자가 회로를 살펴보고 특정 부품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수리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 전자제품은 고집적 반도체와 복잡한 회로기판,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이 많다. 고장의 원인을 찾으려면 제조사 전용 진단장비와 기술자료가 필요할 수 있고, 작은 부품 하나를 납땜해 고치기보다 회로기판 전체를 교체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동네 전파사 기술자가 모든 브랜드와 모든 제품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제조사의 서비스센터가 확대된 것도 큰 변화였다. 대형 가전회사는 전국에 서비스망을 구축하고 전문 기사를 배치했다. 고객은 제품이 고장 나면 동네 전파사가 아니라 제조사 고객센터에 전화하게 됐다. 기사에게는 제품별 매뉴얼과 정품 부품, 진단 프로그램이 제공되기 때문에 수리의 신뢰성도 높았다. 특히 보증기간 안에 발생한 고장은 무상수리가 가능했기 때문에 소비자가 굳이 사설 수리점을 찾을 이유가 줄었다.

 

전자제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도 결정적이었다. 과거에는 TV 한 대를 구입하는 일이 가계에 큰 부담이었지만 대량생산과 기술발전으로 제품 선택지가 크게 늘었다. 오래된 소형가전이 고장 났을 때 출장비와 부품비, 수리비를 합치면 새 제품을 사는 비용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선풍기나 전기포트, 라디오 같은 제품은 수리에 몇 만 원을 쓰느니 새 제품을 사는 쪽을 선택하기 쉬워졌다.

 

제품의 유행과 기술 변화도 수리보다는 교체를 부추겼다.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고장 났을 때 이를 수리하기보다 더 얇고 화질이 좋은 LCD TV로 바꾸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스마트폰 역시 배터리나 화면 외에 핵심 부품이 고장 나면 몇 년 된 기기를 수리하기보다 최신 기종으로 교체하려는 사람이 많다. 제품이 아직 작동하더라도 더 빠르고 성능 좋은 신제품이 나오면 교체하는 소비문화가 자리 잡았다.

 

부품 공급 문제도 있었다. 오래된 제품을 수리하려면 해당 모델에 맞는 부품을 구해야 한다. 생산이 중단된 지 오래된 제품은 부품 자체가 더 이상 나오지 않거나 재고를 찾기 어려워졌다. 과거의 전파사에서는 비슷한 규격의 부품을 활용하거나 직접 배선을 손봐 수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현대 전자기기는 부품 호환성이 낮고 소프트웨어 인증까지 필요한 경우가 있어 임의 수리가 쉽지 않다.

 

전자제품의 안전기준도 높아졌다. 전기와 고전압을 다루는 제품을 잘못 수리하면 화재나 감전 위험이 생길 수 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공식 절차에 따라 검증된 부품으로 수리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소비자 역시 이름을 모르는 작은 수리점보다 공식 서비스센터를 신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결국 전파사를 사라지게 한 것은 전자제품이 줄어들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품은 더 많아졌지만, 고장을 처리하는 방식이 ‘동네 기술자의 손수리’에서 ‘제조사의 표준화된 서비스’로 이동한 것이다.

 

고쳐 쓰는 문화에서 바꿔 쓰는 문화로

동네 전파사가 사라진 변화에는 기술과 유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우리가 물건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다.

 

과거에는 물건이 귀했다. 한 번 산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10년 이상 사용하는 집도 많았고, 고장이 나면 고치는 것이 당연했다. 제품의 겉면이 낡고 버튼이 헐거워져도 내부 부품만 교체하면 계속 쓸 수 있었다. 전파사 주인은 낡은 제품을 보고도 “이건 아직 쓸 만합니다”라고 판단했고, 손님은 수리가 끝난 제품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 몇 년 더 사용했다.

 

지금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제품의 고장보다 ‘낡음’이 교체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면 크기가 작거나 디자인이 오래됐다는 이유로 멀쩡한 TV를 바꾸고, 배터리 성능이 조금 떨어진 스마트폰을 새 기종으로 교체한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오래된 제품은 수리할 가치가 낮다고 느끼기 쉬워졌다.

 

이런 소비방식은 분명 편리하다. 새 제품은 에너지 효율이 높고 기능도 다양하며 고장 가능성도 낮다. 오래된 기기를 여러 번 수리하며 사용하는 것보다 안전하고 경제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제품의 수명은 짧아지고 전자폐기물은 늘어난다. 작동 가능한 기기라도 유행이나 성능 차이 때문에 버려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최근에는 다시 ‘수리할 권리’와 고쳐 쓰는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해외에서는 제조사가 부품과 수리정보를 제공해 소비자와 독립 수리업체가 제품을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자폐기물 문제와 자원순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수리와 재사용의 가치가 다시 강조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전파사의 정신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 사설수리점, 컴퓨터 수리점, 가전 전문 수리업체가 그 역할 일부를 이어받고 있다. 인터넷에는 고장 난 가전제품을 직접 수리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영상도 많다. 필요한 부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해 직접 교체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는 동네 전파사 아저씨에게 맡겼던 일을 이제는 전문센터나 온라인 정보가 나누어 맡는 셈이다.

 

하지만 과거의 전파사가 갖고 있던 동네 생활공간으로서의 성격은 되살리기 어렵다. 전파사 주인은 단골집의 TV가 몇 년 된 제품인지 알고 있었고, 아이가 들고 온 고장 난 라디오를 간단히 손봐주기도 했다. 전기 관련 문제가 생기면 일단 찾아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다. 수리비가 많이 들 것 같으면 “이 정도면 그냥 새로 사는 게 낫겠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전파사 안에는 시간이 쌓여 있었다. 수리를 기다리는 낡은 가전과 다른 제품에서 떼어 보관한 부품, 오래된 회로도와 각종 공구가 있었다. 쓸모없는 고물처럼 보이는 물건도 주인의 눈에는 언젠가 다른 제품을 살릴 수 있는 부품이었다. 버릴 물건과 고칠 물건을 구분하는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신중했다.

 

동네 전파사가 사라진 것은 우리의 생활이 더 편리하고 전문화되었다는 증거다. 이제는 전화 한 통이나 앱 접수만으로 제조사 기사가 집까지 찾아오고, 필요한 부품도 체계적으로 관리된다. 제품의 성능과 안전성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고장 나면 먼저 고쳐본다’는 생활습관을 조금씩 잃었다. 물건의 내부를 열어보고 문제를 찾아내는 대신 새 제품의 가격을 검색한다. 수리비가 얼마인지보다 교체 할인 혜택을 먼저 살핀다. 전자제품은 가족과 오랫동안 함께하는 물건에서 일정한 주기로 교체되는 소비재로 변했다.

 

오래된 골목에서 아직도 ‘전파사’라는 낡은 간판을 발견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게 안에는 최신 제품이 거의 없고, 작업대 한쪽에는 오래된 라디오와 선풍기, 전선과 부품이 놓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가게는 한때 동네 사람들이 비싼 전자제품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살려 쓰게 해주던 중요한 기술공간이었다.

 

TV 화면이 나오지 않으면 새 TV를 주문하기 전에 기사님을 불렀고, 라디오가 고장 나면 새 제품을 찾기 전에 전파사 문을 열었다. 물건은 고장 나도 곧바로 수명을 다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동네 전파사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오래된 업종 하나가 줄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수리해서 오래 쓰는 것’에서 ‘필요하면 새로 바꾸는 것’으로 이동해온 흔적이기도 하다.

 

작업대 위 납땜기에서 피어오르던 작은 연기와, 고장 난 라디오에서 다시 흘러나오던 소리. 그것은 물건 하나를 끝까지 살려 쓰려고 했던 시대의 생활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