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고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 된다.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지면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가 정차하면 뒷문으로 내린다. 운전기사가 운전과 승객 응대를 대부분 담당하지만, 요금 계산이나 문을 여닫는 일은 자동화된 장치가 대신한다.
그러나 과거의 버스에는 운전기사 외에 또 한 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흔히 ‘버스 안내양’이라고 불렸던 여성 차장이었다.
버스 안내양은 승객에게 목적지를 묻고 요금을 받은 뒤 차표를 끊어주었다. 승객들이 모두 탔는지 확인하고, 출입문을 닫은 다음 운전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버스가 정류장에 가까워지면 정류장 이름을 큰 소리로 알렸고, 내릴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오라이!”
이 한마디는 버스 안내양을 상징하는 말처럼 남아 있다. 영어의 ‘All right’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이 표현은 승객의 승차가 끝났으니 출발해도 좋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버스 안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시절, 안내양의 목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버스가 움직였다.
하지만 버스 안내양의 실제 업무는 추억 속 장면처럼 밝고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하루 종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승객을 상대해야 했고, 만원버스에 승객을 태우느라 사람들을 밀어 넣기도 했다. 장시간 노동과 승객의 폭언, 회사의 감시와 몸수색까지 견뎌야 했던 고된 여성 노동이었다.
한때 도시의 거의 모든 버스에서 볼 수 있었던 안내양은 왜 필요했으며, 어떤 일을 했고, 언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일까?

차표를 끊고 문을 닫던 버스 안의 승무원
우리나라에서 버스 안내양과 유사한 여성 승무원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28년 서울시가 운영한 부영버스가 영업을 시작하면서 ‘여차장’ 또는 ‘버스걸’이라 불린 여성 승무원이 등장했다. 당시 버스걸은 양장 형태의 제복을 입고 차표 가방을 멘 신식 직업여성으로 소개되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늘날 기억하는 버스 안내양 제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소장품 설명은 1961년 교통부가 여차장제를 도입하면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널리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안내양은 시내버스에서 요금을 받고 승하차를 돕는 여차장뿐 아니라 고속버스나 관광버스에서 안내 업무를 담당한 여성 승무원까지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버스에는 지금과 같은 교통카드 단말기가 없었다. 승객이 버스에 오르면 안내양이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보고 거리에 맞는 요금을 받았다. 현금을 받은 뒤에는 잔돈을 거슬러주고, 탑승 사실을 증명하는 종이 차표를 끊어 건넸다.
노선과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랐기 때문에 안내양은 정류장과 운임을 정확히 기억해야 했다. 수많은 승객이 한꺼번에 올라타는 혼잡한 상황에서도 누가 요금을 냈고 누가 아직 내지 않았는지 살펴야 했다. 한 손에는 차표를 끊는 도구를 들고, 다른 손으로 돈과 잔돈을 다루는 일이 반복됐다.
승객의 승하차를 관리하는 것도 안내양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과거의 버스는 현재처럼 운전석에서 버튼 하나로 문을 여닫는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안내양이 출입문 근처에 서서 문을 직접 열고 닫거나, 승객들이 모두 탔는지를 확인한 뒤 운전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야 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가까워지면 다음 정류장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다. 안내방송이나 전광판이 없었기 때문에 승객은 안내양의 목소리를 듣고 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 승객이 많아 정류장이 잘 보이지 않는 날에는 안내양의 안내가 더욱 중요했다.
“다음은 종로입니다.”
“내리실 분 안 계세요?”
“오라이!”
안내양이 승객의 승차를 확인하고 문을 닫은 뒤 “오라이”라고 외치면 운전기사는 버스를 출발시켰다. 버스 안에서 운전기사의 눈과 귀를 대신하며 운행을 돕는 사람이 바로 안내양이었다.
당시 도시의 버스는 매우 혼잡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도시 인구는 급증했지만, 대중교통 시설은 증가하는 승객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출입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승객이 몰리기도 했다.
안내양은 문 앞에서 승객들을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고, 뒤에 탄 사람을 밀어 넣으며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버스에 매달린 승객이 없는지 살피고, 옷이나 가방이 문에 끼이지 않았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어린이나 노인, 짐을 든 승객이 안전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안내양의 일이었다. 길을 묻는 승객에게는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경우에는 환승 방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요금 단말기, 자동문, 안내방송, 하차 벨, 전광판이 나누어 맡는 일을 당시에는 안내양 한 사람이 직접 수행했던 셈이다.
추억 속 제복 뒤에 가려진 고된 여성 노동
버스 안내양은 당시 젊은 여성들이 비교적 쉽게 취업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여성이나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마친 뒤 바로 돈을 벌어야 했던 젊은 여성들이 안내양으로 일했다. 우리역사넷은 당시 버스 안내양의 연령이 대체로 19세에서 23세 정도였다고 설명한다.
제복을 입고 승객을 안내하는 모습만 보면 단정한 서비스직처럼 보였지만, 실제 근무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이었다. 우리역사넷에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 안내양의 하루 근무시간은 평균 18시간에서 21시간에 이를 정도로 길었다. 일반적으로 이틀 동안 장시간 일하고 하루를 쉬는 형태의 근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새벽에 첫차 운행을 준비하기 위해 출근해 늦은 밤 막차 운행을 마칠 때까지 버스에 타고 있어야 했다. 차고지에서 노선을 여러 차례 왕복하는 동안 제대로 앉아 쉬기도 어려웠다.
버스는 계속 흔들렸고, 안내양은 그 안에서 요금을 받고 승객을 정리해야 했다. 차가 급정거하거나 급회전할 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한 손으로 손잡이나 문을 붙잡아야 했다. 다른 손으로는 돈을 받고 차표를 끊어야 했으므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컸다.
만원버스의 혼잡함도 안내양에게는 일상이었다.
사람들이 출입문 밖으로 밀려 나올 정도로 승객이 몰리면 안내양은 버스에서 잠시 내렸다가 사람들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도 출입문 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채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고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근무환경이었다.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맞았고, 여름에는 냉방시설이 없는 버스 안에서 더위와 매연을 견뎌야 했다. 차량 내부 공기도 좋지 않았으며, 제대로 식사하거나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안내양을 위한 휴게시설이나 숙소도 충분하지 않았다. 1971년 YWCA가 조사한 버스업체 55곳 가운데 기숙사가 있는 회사는 40곳, 세면장을 갖춘 회사는 31곳에 불과했다. 일부 회사에는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숙소까지 있었고, 시설이 있더라도 좁고 비위생적인 경우가 많았다.
승객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컸다.
요금을 내지 않으려는 승객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취객의 폭언과 희롱을 견뎌야 했다. 버스가 늦게 오거나 너무 혼잡하다는 불만도 안내양에게 향하곤 했다. 운행 일정이나 버스 수를 결정할 권한은 없었지만, 승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모든 불만을 받아내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버스회사의 감시와 인권침해였다.
안내양은 하루 동안 승객에게 받은 요금을 회사에 정확하게 제출해야 했다. 회사는 안내양이 요금 일부를 몰래 빼돌리는 이른바 ‘삥땅’을 하지 않는지 의심했다. 이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업무가 끝난 뒤 안내양의 몸과 소지품을 검사하는 ‘검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우리역사넷은 일부 회사에서 남성 직원이 여성 안내양의 몸을 수색했고, 그 과정에서 성추행까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안내양들은 심한 수치심을 느꼈지만 회사의 관행에 쉽게 저항하기 어려웠다.
승객에게 받은 돈이 맞지 않으면 안내양이 부족한 금액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혼잡한 차 안에서 요금을 받다 보면 돈을 잘못 계산하거나 승객이 돈을 냈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손실의 책임을 안내양에게 돌리기 쉬웠다.
버스 안내양의 상징처럼 남은 “오라이”라는 외침은 밝고 씩씩하게 기억된다. 하지만 그 목소리 뒤에는 하루 18시간 이상 흔들리는 차 안에서 서 있어야 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피로가 있었다.
이 때문에 버스 안내양을 과거의 낭만적인 풍경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제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승객에게 미소를 짓고 정류장을 안내하던 모습은 분명 한 시대의 생활문화였다. 동시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환경과 성차별적인 감시를 견뎌야 했던 여성 노동의 역사이기도 했다.
자동문과 시민자율버스의 등장, 안내양이 사라진 자리
버스 안내양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버스가 ‘원맨버스’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맨버스란 운전기사 한 사람이 차량 운행과 승객의 승하차 관리를 함께 담당하는 버스를 뜻한다. 안내양 없이도 버스를 운행할 수 있도록 차량 구조와 요금 지불 방식이 바뀐 것이다.
자동문이 설치되면서 운전기사가 운전석의 버튼으로 출입문을 여닫을 수 있게 됐다. 안내양이 직접 문을 닫고 “오라이”라고 외쳐 출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요금 지불 방식도 변했다.
승객이 승차하면서 운전석 근처의 요금함에 현금이나 회수권, 토큰을 직접 넣는 방식이 확대됐다. 안내양이 승객 한 명 한 명에게 목적지를 묻고 차표를 끊어줄 필요가 줄어든 것이다.
정류장 안내 역시 자동방송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 안내방송 장치가 설치되면서 다음 정류장을 사람이 직접 외치지 않아도 되었다. 하차 벨이 보급되자 승객은 내리고 싶은 정류장 전에 직접 벨을 누를 수 있게 됐다.
우리역사넷은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안내양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 사라졌다고 설명한다.
안내양이 사라진 배경에는 기술적인 변화뿐 아니라 버스회사의 비용 절감도 있었다.
버스 한 대에 운전기사와 안내양 두 명을 배치하는 것보다 운전기사 한 사람만 두는 편이 회사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었다. 자동문과 요금함을 설치하는 초기 비용이 들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경제적이었다.
승객 입장에서도 직접 요금을 내고 하차 벨을 누르는 방식에 적응하면서 안내양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안내양이 사라진 뒤에는 운전기사가 승객의 안전과 요금 확인까지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
다만 안내양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하던 일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차표를 끊는 일은 현금 요금함과 토큰, 회수권을 거쳐 교통카드 단말기가 맡게 됐다. 정류장을 알려주는 일은 자동안내방송과 전광판으로 넘어갔다. 승객이 내릴지 확인하는 일은 하차 벨이 대신했고, 출입문은 운전석에서 원격으로 조작하게 됐다.
한 사람이 수행하던 업무가 여러 기계와 장치로 분산된 것이다.
현재는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대면 요금이 자동으로 계산된다. 정류장 이름은 음성과 화면으로 안내되고, 스마트폰 앱을 통해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저상버스에는 교통약자의 승하차를 돕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차량 내부와 정류장에는 다양한 안전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날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안내양은 낯선 직업이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도시를 오갔던 사람들에게 안내양은 일상의 일부였다. 버스에 올라 목적지를 말하면 익숙하게 요금을 계산해주고, 혼잡한 차 안에서 승객을 정리하며, 다음 정류장을 큰 소리로 외쳐주던 사람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버스는 더 조용하고 편리해졌다.
교통카드를 찍는 데에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고, 자동문은 운전기사의 버튼 하나로 열린다. 정류장을 놓칠까 걱정되면 전광판을 보거나 스마트폰 지도를 확인하면 된다. 안내양과 승객이 말을 주고받을 일도 없어졌다.
편리함은 커졌지만, 버스는 과거보다 조금 더 비인간적인 공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안내양에게 목적지를 물어보고, 잔돈을 주고받고, 내릴 곳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생겼다. 안내양은 노선을 모르는 승객에게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자 버스 안의 질서를 관리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시절을 무조건 따뜻하게만 회상할 수는 없다.
승객과 정을 나누던 기억 뒤에는 젊은 여성의 값싼 노동에 의존해 운영된 대중교통 시스템이 있었다. 안내양이 사라진 것은 생활의 정겨운 풍경 하나가 없어진 일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이 감당하던 지나치게 고된 노동을 기술이 대신하게 된 변화이기도 하다.
버스 안내양은 단순히 차표를 끊어주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동문도, 교통카드도, 안내방송도 없던 시대에 버스 운행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인 승무원이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요금을 받고, 승객을 태우고, 문을 닫고, 길을 안내하며 도시의 하루를 움직였다.
지금은 오래된 사진과 영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버스 안내양.
“오라이!”라는 힘찬 외침을 기억할 때에는 그 소리와 함께, 우리 도시의 성장 과정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던 젊은 여성들의 삶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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